2011년 8월 4일

비디오게임에 대한 토론에 비디오게임이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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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왜 게임 업계 사람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이 아닌 타자들에 의해 논쟁의 도구가 되는가? 게임 연구자이자 인디 게임 개발자인 이안 보고스트가 코타쿠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래는 당장 번역할 계획이 없었는데 매경이코노미 편집부장이 쓴 "망국의 유희"라는 칼럼이 논쟁이 되길래, 거기에 덧붙일 수 있는 관점이라 생각해 쾌속으로 번역했습니다.

수정: 이해를 돕고자, 배경지식을 알려주는 역주를 붙였습니다.


이안 보고스트 (Ian Bogost) | 2011년 8월 1일 | 원문보기

연방대법원이 미성년자에게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 캘리포니아 법에 대해 판결을 내린 뒤, 그에 대한 반응이 인터넷에 끓어 넘쳤다. (역주: 판결 관련 한국어 기사. 판결문을 요약한 것도 있다. 이 판결은 비디오게임이 미국 헌법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음을 확인하는 판결이었다.) 구글 뉴스 검색 결과비디오게임이 헌법 제1조의 권리를 보장받은 것에 대한 축하부터 폭력의 승리라는 규탄까지 다양한 견해를 보여준다.

판결 이후 얼마 안 있어, 내 뉴스게임 작업에 대한 반응(긍정과 부정)을 통해 표현의 자유로써의 게임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를 접할 수 있었다. (역주: 글쓴이인 이안 보고스트는 ‘뉴스게임’의 연구와 제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뉴스게임이란 말 그대로 게임을 통해 뉴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고스트는 기존 뉴스의 단순한 전달보다는 게임의 구조가 사건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뉴스게임의 사례와 방법론을 연구한 책을 쓰기도 했다.)

긍정적인 반응은 로라 베넷이 보스턴 글로브에 쓴 긴 기사이다. 기사는 뉴스게임 개념에 대해 세세하게 소개(대부분 내 책에서 끌어온 것이다)하고 몇 가지 예시를 이야기했다. 또 제인 맥고니걸의 “즉시적 낙관주의” 접근법과 Jim Gee, ImpactGames 등 관련된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건 물론, 1980년대로 거슬러가는 정치적 게임의 역사에 대한 개관도 담고 있다. 주류 신문임을 감안하면 이만큼 좋은 기사는 없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선 것은 “테메큘라 주민” 필 스트릭랜드가 샌 디에고 북부 지역 신문 노스 컨트리 타임즈에 쓴 오피니언 칼럼이다. 스트릭랜드는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정말 불결한 것들”을 이용 가능한 세태에 이번 대법원 판결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불결하다 예를 든 게임은 뭘까? 뉴욕 타임즈에서 조엘 바칸이 규탄한 불쾌한 유아용 게임이 아니라, 내 뉴스게임이다! 스트릭랜드가 뉴스게임 전반에 대해, 그리고 내 두 게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보자.

“뉴스게임”이란 건 자신이 시사문제에 대해 선호하는 관점에 근거해 손쉽게 세상을 변형할 수 있게 하는 농간이다.

뉴스를 전한다고 만들어진 최근 게임으론 뉴욕 타임즈를 통해 전달된 두 게임이 있다. 하나는 식품 오염을 막는 것의 어려움을 그리는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플레이어가 2007년 맥케인/캐네디 법안 하에서 그린 카드를 받으려고 하는 이민 게임이다.

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보기엔.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쉽게 무시하듯이, 이 뉴 미디어에는 오류가 없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책무가 없다.

내가 스트릭랜드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많다. 맥케인/케네디 법안 자체는 양당에서 명망이 높은 두 상원의원이 함께 낸 법안이었다. 내 게임은 그 법 구문의 충실한 시뮬레이션이었고, 전통적인 뉴스 기사(대부분 케네디의 보도자료를 베낀)보다 더 세세하게 법안이 제시한 그린카드 부여제도에 대해 자세히 전달했다. 스트릭랜드가 말하는 진실을 말할 전통적 뉴스 매체의 책무란 정치적 스펙트럼을 막론하고 항상 그랬듯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가 Newsgames 책에서 다룬 뉴스게임 중 어떤 것도 “선호하는 관점에 근거해 세상을 변형할 수 있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트릭랜드 자신이 우리 책을 읽지도 우리 게임을 해보지도 않고 그가 선호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변형하고 있다.

스트릭랜드의 견해는 별 영향력이 없다며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기 쉽다. 분명 보통은 보스턴 글로브의 목소리가 더 존중 받는다. 내가 왜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면 주목 받지 않고 흘러갈 이야기에 반응하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전에, 앞서 내가 링크한 구글 뉴스 검색 결과를 정독해보길 권한다. 스트릭랜드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다. 보스턴 글로브가 예외다. 베넷이 주제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단 점 때문이 아니라, 결론을 이끌어내기 전에 ‘실제로 조사’를 해보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론이 뉴스게임과 저널리즘 양쪽 고유의 도전들로부터 이끌어졌기 때문이다.

뉴스게임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지지와 험담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게임 그 자체’와 ‘누군가의 담론 기계 속의 부품으로써의 게임’ 사이의 충돌이다.

대법원이 게임에 대한 견해를 내놓기 딱 한 달 전, 행정부 인사로부터 게임을 지지하는 공개적인 성명이 나왔다. 뉴욕 시에서 열린 게임스 포 체인지(Games for Change) 페스티벌에서 앨 고어가 게임이 사회를 발전시킬 잠재력에 대해 연설한 것이다. (역주: 게임스 포 체인지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게임을 지원하는 비영리 기구로, 2007년 한국 지부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가 설명하길,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징가의 마크 핀커스와 전 EA 경영진 빙 고든이었다. 둘 다 정치적이거나 창조적인 비전보다는 철면피에 완고한 비즈니스맨으로 잘 알려진 인사들이다.

스테판 토틸로는 고어를 두고 게임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이야기한 점을 비난했다. 실제로 고어는 연설 중에 “퐁”(Pong) 이후로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고 인정했다. 토틸로는 고어를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비디오게임 옹호자로 분류했다. 그 분류에는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 의견서를 낸 안토닌 스칼리아 판사도 포함되어있다.

토틸로는 게임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게임이 “세상을 바꾸는” 힘에 대해 신중하고 회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게 아니라, 회의적인 것이다. 게임을 만드는 건 어렵다. 시민들이 공동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게임을 만드는 건 더 어렵다. 아직까지도 소수만이 진정 훌륭한 모범으로 남아있다.

트위터 상에서의 짧은 답변을 통해 게임스 포 체인지의 공동대표 아시 부락은 이야기했다. “앨 고어가 게임의 힘과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이해하려고 꼭 게임을 해봐야 하는가” 그가 요점을 잡았다. 고어가 한 연설의 목적은 실용적인 게 아니었다. 실용적 연설은 그가 부통령으로서 기후변화 운동을 설명하며 대중 매체가 사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끌어낸 것들이었다.

고어의 비디오게임 찬가는 수사적인 목적이었다. 대법원이 비디오게임에 대해 판결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어의 키노트는 “중요인사가 비디오게임을 발언”하는 일이었다. 그가 게임을 만들어봤는지, 해봤는지는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중요하지 않다. 그가 게임을 좋은 친구들이라고 하는 건 사회 공학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진행된다.

보스턴 글로브에서 뉴스게임을 다룬 베넷의 기사와 스트릭랜드의 즉흥적 견해는 내용은 다르지만 그 종류는 동일하다. 그와 유사하게 스칼리아와 고어가 게임은 인정한 것은 리랜드 이와 조 리버맨이 게임을 비난한 것과 종류가 같다. (역주: 리랜드 이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으로 비디오게임 규제법을 발의한 장본인이다. 조 리버맨은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역시 비디오게임의 폭력성에 대해 꾸준히 비판해온 정치인이다.)

달리 이야기해보자. 우리가 앨 고어와 리랜드 이,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들은 메시지의 ‘내용’은, 비디오게임을 선택된 맥락 속에 도구로 위치시키는 메시지의 ‘기능’보다 중요하지 않다. 앨 고어와 게임스 포 체인지에게 그 맥락이란 정치적 포부다. 리랜드 이에게 그것은 가족적 가치다. 스칼리아에게 그것은 헌법적 권리의 보장이다. 테메큘라 주민 스트릭랜드에게 그것은 시민의 목소리다. 경제학자 로빈 한슨이 정치는 정책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대로다. 비디오게임 논쟁은 게임을 플레이함에 대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오바마 행정부가 작년에 아이들의 건강을 위한 앱 공모전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목적은 기술주의였다. 행정부가 청소년과 하이테크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노력이었다. 그 ‘앱’들이 좋은 점이 있을지 없을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힌트: 없다). 중요했던 것은 행정부가 유행에 밝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건 어느 정도 통했다.

마찬가지로, 게임 개발자게임 업계 로비스트들이 대법원에서의 “승리”라는 낭만에 도취한다면 논점을 놓친 것이다. 판결은 비디오게임보다는 헌법 제1조의 존엄성을 다룬 것이다. 판사들의 게임에 대한 견해는 그저 어떤 표본(비디오게임)이 그것에 예외로 둘만한가를 결정하는 바였을 뿐이다. 내가 전에 주장했듯, 대부분 개발자들은 뭔가 지킬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표현할 수 있게 된 기회를 잡을 생각이 없다. CEO들은 우스운 성명을 내놓고 사무실로 돌아가 다음에 만들 짝퉁 슈팅 게임이 여전히 상업성이 높다는데 기뻐한다.

정말로 비디오게임을 플레이하고 비평하는 우리들은 이제 교훈을 배울 때다. 게임의 이점이나 위험에 관한 거의 모든 논쟁에 전혀 게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 논쟁이 게임을 지지하는지 매도하는지는 상관없다. 대체로 그들은 그걸 위해 논쟁하는 게 아니라, 뭔가 더 원칙적인 걸 추구한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다양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써가 아니라 논쟁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가장 좋은 방법은 다양성이다. 플레이어의 다양성 뿐 아니라 게임의 다양성, 활용의 다양성이다. 더 많은 게임이 존재하고, 그것이 더 많은 맥락 속에서 존재할 때, 개별 게임(그것이 학살 게임이든 입국 등록 게임이든)은 덜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게임의 ‘소재’와 ‘주제’와 ‘청중’보다 그것이 놓인 ‘맥락’과 ‘목적’이 중요하다. 미성숙 판타지와 정치 운동 뿐 아니라,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있어야 한다.

게임이 순수 예술로 인정받거나 모든 연령과 배경의 사람들에게 플레이되길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디오게임 문화의 미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목표와 열정을 추구할 수 있는, 갖가지 기이한 모양과 크기, 목적을 지닌 게임으로 들어찬, 풍부하고 다양한 생태계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게임이 책과 영화 같은 것들의 “수준에 도달”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매체들처럼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의 구석과 틈으로 퍼질 필요는 있다. 제작자들이 더 신중하게 그런 생태계를 구성해나간다면, 게임이 타자들의 논쟁에서 볼모로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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