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5일

밸런스 오브 파워, Ⅲ.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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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마다...찾아와야 했지만, 이번 주에는 금요일 밤에 찾아오게 된(ㅠㅠ) 밸런스 오브 파워의 제작과정입니다. 오늘은 책의 세 번째 장인 "쿠데타"가 시작됩니다. "반란"을 다뤘던 두 번째 장이 그랬듯이, 세 번째 장도 먼저 쿠데타에 대해 설명하고, 게임 속에 시스템으로 구현했던 방법을 묘사한 다음, 마지막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자, 가볼까요?



※ 제가 정치/역사 전문가가 아니니 잘못된 표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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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반란에 대한 보상은 혁명, 즉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변화를 통해 정부를 조직한다. 정부를 변화시키는 덜 폭력적인 방법도 있다. 그 대안을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는 "행정부의 교체"이다. 이건 조금 불편하고 학구적인 용어라서, <밸런스 오브 파워>에서는 그러한 권력의 변화를 모두 친숙한 꼬리표인 '쿠데타'[coup d'état]로 묶었다. 이 장에서는 쿠데타의 본질을 살펴보고 <밸런스 오브 파워>가 그것을 어떻게 다뤘는지 설명할 것이다.

쿠데타는 행정부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오래된 지도자는 축출되고 새로운 지도자가 그 자리에 세워진다. 정부의 중·하층부는 그대로 남아있고, 상층부만이 바뀐다. 이것에는 두 가지 변형이 있다. "행정부의 정규적인 교체"와 "행정부의 정규적이지 않은 교체"이다. 첫번째는 선거처럼 인정받은 법적인 절차를 이용하여 지도자를 교체한다. 두번째는 덜 형식적인 절차를 밟는다. 머리에 탄환이 관통하는 것처럼.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먼저 그것에 사용되는 폭력의 강도에 있다. 혁명은 단순히 화해 불가능한 두 세력 간의 군사력 경쟁이라고 볼 수 있다. 양 세력은 패배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 편이 근본적인 진실이고 정당한 위치에 있음을 강하게 믿고, 상대편이야말로 악이라고 생각한다. 반란에 있어 두 세력 사이의 간극은 협상이라는 해법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반란은 씁쓸한 결말로 치닫는다. 패자는 패할 때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에게 총구를 겨눈다.

쿠데타는 보통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많은 쿠데타가 피를 보지 않는다. 가장 폭력적인 쿠데타라도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오기 힘들다. 학살이 쿠데타의 의도된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일도 드물다. 학살은 오직 쿠데타가 흔들리고 파벌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을 때만 일어난다. 반란에 있어서는 대량 폭력사태가 주된 전략인 반면, 쿠데타에 있어서는 타개책이다.

쿠데타와 반란의 또 다른 차이점은 그 전개에 걸리는 시간의 규모에 있다. 반란은 몇 년에 걸쳐 발전하며 성장한다. 어떤 반란은 수십년을 끌기도 하고, 가장 빠른 반란이래봐야 몇 년이 걸린다. 반면, 쿠데타는 계획에 몇 개월, 실행에 몇 시간이면 된다. 가장 길게 끈 쿠데타라고 해도 몇 년을 넘지 않는다.

쿠데타와 반란의 세 번째 차이점은 혁명이 보통 사회에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반면, 쿠데타는 그런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쿠데타가 어떤 정책변화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문제는 누가 자리에 앉아있느냐는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에 쿠데타가 혁명에 비견될 정도로 대대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쿠데타에 있어 극적인 변화가 적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세력이든, 어떤 종류의 변화건 극적인  변화는 많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든다. 가진 자의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포와 가지지 못 한자의 기회에 대한 흥분은 폭력 없이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1. 폭력의 스펙트럼

쿠데타에는 많은 유형이 있다. 최소한 내가 넓은 범주로 쿠데테라고 묶기로 한 정치적 현상은 많다. 그 현상들은 하나의 중요한 변수를 바탕으로 정렬할 수 있는데, 바로 쿠데타에 동반되는 폭력의 양이다. 먼저 가장 폭력적인 극단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가장 평화로운 쿠데타까지 살펴보겠다.

폭력 군사 쿠데타

가장 폭력적인 쿠데타는 군 내부의 세력이 권력을 잡으려고 할 때 나타난다. 때로는 그리 많은 싸움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공모자가 권력을 굳건하게 다지기 전에 기존의 정권에 대한 충성스러운 지지기반이 움직인다면 엄청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예멘에서 최근 일어난 싸움이 이런 성격이다. 더구나 양측을 지지하는 부대 모두가 성공을 각오하며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길고 폭력적인 싸움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예멘에서의 쿠데타는 현대 무기가 장기적인 게릴라 전술보다 직접적인 싸움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보여준다.

더 전형적인 군사 쿠데타는 1985년 태국에서 시도되었던 쿠데타이다. 다수의 군 부대가 대통령궁에 모였고, 충성스러운 군대가 구하러 달려왔다. 몇 시간 동안 긴장이 흐르고, 몇 번의 경고사격이 있은 뒤, 반역 부대는 자신들의 행동이 전면적인 반란으로 번지지 못 할 것이라 깨닫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아주 적은 사상자만이 나왔다.

궁정 쿠데타

궁정 쿠데타는 군사 쿠데타의 변형이다. 군사력을 대통령과 그 직속 부하에게만 행사해 사상자를 줄이려는 시도이다. 선동자들이 몇몇 병사를 데리고 대통령궁에 나타나고, 대통령의 머리에 총알을 집어 넣는다. 일이 잘 된다면 그 자리에 앉게 된다. 아마 아무나 쏜 다음에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문제로 궁정 쿠데타가 힘들어 졌다.

먼저, 거칠고 위협이 많은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항상 자기 곁에 유능한 경호원을 붙여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대통령궁에 쳐들어 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 진다. 소비에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들의 우애 깊은 형제를 도와줬다가 낙심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병사 몇 명만 잡고 대통령궁으로 들어가 아프간 대통령인 아민[Hafizullah Amin]의 머리에 총알만 박으면 될 줄 알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경호원들의 거센 방어에, 그들의 머릿수도 줄이지 못 했다. 아민이 바리케이드를 치며 거의 하루동안 격렬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

궁정 쿠데타의 또 다른 문제는, 더 품위가 있는 국가에서는 대통령을 암살한다고 해서 새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금방 나라 전체, 특히 군대 전체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이크!

비폭력 군사 쿠데타

쿠데타 스펙트럼에서 그 다음에 위치하는 게 비폭력 군사 쿠데타이다. 이는 힘을 과시하고 상대를 위협하면서 폭력은 피하는 수단으로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1944년 7월 히틀러에 대한 쿠데타 시도가 이런 성격이었다. 공모자들은 폭탄으로 히틀러를 죽이고 베를린에서 그를 따르는 세력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폭력 행위는 폭탄 뿐이었고, 나머지 쿠데타는 권총과 경비, 상당량의 허세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실패했다. 몇몇 주요 군사령관들이 노골적인 군사력 위에 세워진 지도자의 적절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공모자들은 독일 장군들이 잔혹한 군사 쿠데타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교양이 높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왠 아이러니인가?

군사 쿠데타란 민간정부에서 신임을 잃은 장성들이 대통령궁에 탱크를 몰고 나타나 민간정부가 군사정권으로 대체되었음을 알리는 단순명료한 사건이다. 표면상, 군사정권은 비상사태를 진정시키고 상황이 안정되면 투표를 실시할 것이다.

아마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군사 쿠데타는 몇 년 전 스페인에서 일어난 쿠데타 시도일 것이다. 스페인 대령은 몇몇 병사를 대동해 국회에 나타나, 천장에 총을 쏘고 이 미숙한 민주주의가 군대에 의해 중지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군의 다른 구성원도 그와 함께 하리라 예상했다. 스페인은 숨을 죽였다. "군이 어떻게 할까?" 그 순간,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군복을 입고 텔레비전에 나타나 이 "범죄행위"를 비난하며 자신의 위신을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데 썼다. 결국 원하는대로 됐다. 장성들은 전화로 충성을 서약했고 사태는 국회에서 권총을 든 미치광이를 몰아 붙였다. 그는 투항했고 지금은 감옥에 있다. 이 사건은 입헌군주의 막대한 가치를 보여주었다. 군주는 정치 위에 있음으로써 이념에 관계 없이 사람들의 신임을 유지했다. 민주적 성마름 속에서 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위기사태에, 군주가 개입하여 그의 위신을 던져 법과 질서의 힘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한 일이다. 그 날, 그는 셀 수 없는 시간의 보상을 얻었다. 헌법에 충성을 다짐한 미국인은 그런 체제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게 잘 통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민중반란

쿠데타의 다음 형태는 민중반란이다. 민중의 정부에 대한 분노가 끓어 거리 시위가 폭동으로 치닫는 것이다.  정부에 화난 사람이 충분하다면, 그들은 금방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진실 중 하나를 깨닫게 된다. 어떤 정부도 사람들의 동의 없이 기능할 수 없다. 어떤 군이나 경찰 병력도, 얼마나 크거나 강하든, 민중의 의지에 반대하여 통제권을 유지할 수 없다. 치하에서 긴 고통을 받았을 수록, 민중의 폭동 난행은 더 거칠어 질 것이다. 이는 정부가 모든 통치 능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보자, 거리의 평화마저도 지키지 못 한다면, 기능하는 정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짐을 싸고 새 정부가 인계하게 하는 것 뿐이다. 아이티 민중의 베이비 독 뒤발리에[Baby Doc Duvalier]에 대한 증오가 그랬다. 아이티인들은 뒤발리에의 흉악한 비밀경찰 톤톤 마쿠트[Tontons Macoutes]에 대한 공포를 뒤엎고, 정부를 전복시켰다. 비슷한 상황이 이란의 샤[국왕]가 샤의 비밀경찰 사바크[Savak]에도 불구하고 몰락하는 데 일조했다. 폴란드 공산당 정부의 에드바르트 기에레크[Edward Gierek]도 1970년, 공산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억압 수단의 동원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전복되었다.

하지만 이 성공한 민중반란들은 예외일 뿐, 표준이 아니다. 내정불안은 세계 여러 국가의 평균상태이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건 다반사다. 앞서 언급한 세 개의 사례(아이티, 이란, 폴란드)에서도, 지도층은 돌이키기엔 때가 늦을 때까지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무감각한 태도의 원인은 시민 불복종이 너무 잦아 화제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경우, 경찰의 탄압이 있고 군중들은 분노를 분출한 뒤 흩어진다. 지난 40년간 10,000번의 폭동이 있었다. 그 중 100건, 1% 정도가 관료의 교체를 야기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시민 불복종 때문에 자기 자리가 위협받지 않으리라 보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정치 쿠데타

다음 형태의 쿠데타는 순수한 정치 쿠데타이다. 소련과 많은 공산국가는 이런 형태의 정부 일신에 크게 의존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공산국가의 근본규율이 군에 대한 당의 통제의 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국가에서 군이 개입하는 쿠데타는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선거도 없기 때문에 무능력한 지도자를 교체하는 수단은 오직 정치 쿠데타 밖에 없다. 이는 보통 현 지도층에 반대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추대하는 합의를 만드는 일련의 복잡한 정치적 음모를 통해 수행된다. 이 과정에는 그런 음모를 지도자에게 숨기고 대항하지 못 하게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1964년 니키타 후르쇼프의 축출이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후르쇼프는 어리석게도 남부로 휴가를 떠나 공모자들에게 자유롭게 모스크바에서 일을 진행할 기회를 줬다. 후르쇼프는 충신들이 경고하는 전화에도 응답하지 못 해 권력을 유지할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게 되었다. 그가 행동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브레즈네프-코시긴 일파가 당 내에서 세를 규합하였고, 후르쇼프는 축출되었다.

제도화된 "쿠데타"

마지막으로 제도화된 형태의 쿠데타가 있다. 이는 서방 민주주의국의 우선 분야로, 이들 국가는 더 조직화되고 덜 분열적인 방법으로 거미집을 걷어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의회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서방 국가의 대부분은 의회의 신임을 즐길 수 있는 동안만 연립 정부가 존재할 수 있다. 한 번 신임을 잃게 되면, 스스로 해산하고 새로운 연립을 조직하게 된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체계는 정기적으로 일정이 잡힌 선거를 통해 정부 관료를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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