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1일

밸런스 오브 파워, Ⅰ-2. 지정학을 모델링하는 게임의 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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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의 끝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

책에 대한 설명은 이 포스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P.S. 구글에 "밸런스 오브 파워" 검색하면 맨 처음 나오는 위키도 제 번역 맞습니다. 이 연재는 기존에 번역했던 부분(약 23%)을 다시 번역하고, 못 다한 부분까지 완전하게 번역하기 위해 시작한 겁니다. 현재 위키에 있는 것은 다소 예전 번역이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 할 수도 있지만, 보고 싶으신 분은 미리 읽어 보셔도 좋을 겁니다.



수정(2010/03/08): process의 번역 부분 수정. 또한 process intensity의 번역을 '과정 중심'에서 '처리 강도'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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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정학을 모델링하는 게임의 함축

지금까지 논했던 것들을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의 답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밸런스 오브 파워>는 얼마나 사실적인가?" 이 게임이 반드시 근본적으로 부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건 현실을 표현한 게임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필연적으로 현실을 왜곡해야 했다. 예를 들어, 이 게임은 지정학적에서 대립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고,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에는 단순화된 관점을 나타냈다. 현실을 왜곡했다고 해서 이 게임이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초상화가는 대상의 얼굴에서 성격을 드러내는 특징들을 강조하고 그 특징을 단순화한 표현으로 절충시킨다. 이런 과정으로 화가는 진실을 드러내고자 현실을 왜곡하지만,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한 문제를 생각해보자. 게임 상에 얼마나 많은 국가가 표현되어야 할까? 언뜻 생각해 보면 세계의 모든 국가를 포함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분명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답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지정학적 상호작용에 대한 게임이다. 문제는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것이 과연 지정학적 상호작용에 대한 표현의 명료함을 높이느냐, 낮추느냐이다. 세계 150여 개 국가 중 대부분은 어떤 사건이 터져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전까지는 수십 년을 평화 속에서 지낸다.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미국이 침공하기 전의 그레나다를 알고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카빈다, 안도라, 샌 마리오, 오맨, 부룬디, 기니비사우, 가봉 같은 국가들을 들어보기나 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리타니아와 모리셔스의 차이를 알고 있을까? 거대한 지정학적 힘의 작용을 이해할 때 이 작은 국가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그게 주의를 흐트러 트리지 않을까?

지정학의 체계는 두 개의 초권력, 십 여개의 주류 권력, 수십 여개의 비주류 권력, 그리고 수많은 무(無)권력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무권력 국가들이 지정학적 무대에서 맡는 역할이란 체스에서 졸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게임이든 지정학적 과정의 본질을 밝히려 한다면 먼저 초권력에 집중해야 한다. 초권력이 싸움에 이용할 졸도 분명 있어야겠지만, 그 역할은 항상 부차적이다.

나는 <밸런스 오브 파워>를 디자인하면서 무권력 국가들을 너무 많이 포함하면 게임에 해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것이 만약 시뮬레이션이라면 긍정적인 요소가 되더라도 말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62개 국가만을 포함했다. 사실성을 높여주는 디테일은 시뮬레이션에는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 무권력 국가를 너무 많이 넣으면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밸런스 오브 파워>에 작은 국가를 필요 이상으로 넣는 것은 말 그대로 쓸데없는 일이며, 책상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머리만 복잡하게 할 뿐이다.

상대적 사실주의

이 게임의 사실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바로 사실주의의 개념이 항상 관찰자의 지각에 의해 상대적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정치학 교수와 12살 아이가 이 게임을 보는 시선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게임에 있어 정밀함의 수준은 반드시 그 게임을 할 법한 사람들의 지적 배경에 맞추어 져야 한다. 내가 초기에 매킨토시를 플랫폼으로 잡은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나는 매킨토시 사용자들이 지적으로 성숙한 그룹일 것이라 예상했다. <밸런스 오브 파워>처럼 복잡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엄청난 지적 노력을 요구한다.

게임 디자이너는 반드시 그것의 청중에 적절한 수준의 사실주의를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청중보다 더 교육받은 이들은 비웃음을, 그 청중보다 덜 교육받은 이들은 이해부족을 나타낼 것이다. 사람들의 교육수준 분포는 고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게임 디자이너들은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게임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대학 수준의 교육을 요하는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에게는 강한 (한 편집자가 말하길, "광적이고 완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밸런스 오브 파워>는 약간 많이 높은 곳을 노려야 했다. 나는 평균적인 미국인보다 지정학적 이슈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어렵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한 실망과 당혹감의 근원이었다.

"과정으로서의 사실주의"와 "자료로서의 사실주의"

사실주의에 대해 또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과정'[프로세스, process]의 사실주의와 그에 반대되는 '자료'[데이터, data]의 사실주의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료의 관점에서 사실주의를 생각한다. 국민총생산(GNP)이 제대로 보고되고 있는지, 혹은 이 나라에 있는 군부대의 수가 정확한지를 따진다. 하지만 사실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가 아니라, 과정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의 작품 <월든>에서 잘 지적했다.

만약 누군가가 강도를 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사고로 죽거나, 집이 불타거나, 배관이 터지거나, 배가 폭발하거나, 젖소가 서부 도로를 달리거나, 미친 개가 죽거나, 겨울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는 이야기를 읽었다면, 다른 것을 읽을 필요가 없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그 사건들의 원리에 정통하다면, 수많은 사례를 신경쓸 이유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바로 원리[principle]이다. 사례가 아니다. 그리고 원리란 과정이다. 가나의 GNP가 실질적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덜 중요하다. 지정학을 다루는 게임이라면 GNP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니카라과가 워싱턴과의 외교적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덜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왜 니카라과와 워싱턴이 사이가 좋지 않은가이다. '사실'과 상호작용할 수는 없다. 사실이란 죽은 물고기와 같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과정'과는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 모양을 다듬고 매개변수를 바꾸어 그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을 학습할 수 있다. 사실이란 책이나 다른 고정적인 매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다. 컴퓨터는 처리를 동반하는 문제에 가장 잘 어울린다. 컴퓨터를 대변하는 말인 '데이터 처리 장치'[data processor]에서 처리가 뒤에 오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footnote]역주: '과정'과 '처리' 모두 process의 번역이다. 일반적인 문맥에서 process는 과정, 공정 등의 의미지만, 컴퓨터와 관련되면 프로세스, (정보의) 처리를 의미한다. 앞으로 process의 번역은 문맥에 따라 처리나 과정으로 번갈아 쓰일 것이다.[/footnote]

과정이 진짜 세계이다. 우리가 살아서 100년 뒤를 본다면, 우리 후손이 니카라과와의 실랑이가 별 의미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니카라과와의 관계를 좌우하는 원리, 그 과정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2000년도 더 전에,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쓰며,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아테네의 성장과 이를 두려워한 스파르타였다"고 말했다. "아테네"를 "미국"으로, "스파르타"를 "러시아"로 바꿔보면 판단이 설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사실은 먼지 같이 사라졌지만, 그 원리는 바뀌지 않았다.

내가 '처리 강도'[process intensity]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이 책을 조직하는 원리이다. 이 책의 각 장은 각자 내가 게임에서 강조한 네 가지 지정학적 상호작용의 과정(폭동, 쿠데타, 핀란드화, 위기)을 다루고 있다. 그 안에 짧게 사실을 불어넣었지만, 사실은 일시적인 것이다. 반면 과정은 영구적인 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게임을 업데이트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온다. 그들은 마르코스의 실각이나 미국의 리비아 공격 같은 사건들이 게임의 환경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건들은 게임의 겉모양만을 바꿀 뿐, 본질을 바꾸진 않는다. <밸런스 오브 파워>는 지정학적 상호작용에 대한 게임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원리들은 핵을 탑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도입된 이래 근본적으로 바뀐 적이 없다. 작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게임에 포함시키는 작업은 몇 시간 걸리지 않는다. 1960년대를 다룬 게임을 만든다 해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세부사항은 바뀌었지만 원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밸런스 오브 파워>는 세부사항이 아니라 원리를 다루는 게임이다. 업데이트 계획은 전혀 없다. 업데이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footnote]역주: 하지만 1989년에 새로운 국가와 모드, 2인용 플레이 등이 추가된 1990년판이 발매되었다.[/footnote]

3. 사실주의와 학습

게임에 있어 사실주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전문성의 수준에 상대적이라면, 게임의 학습과정 자체가 게임 자체를 덜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 말은, <밸런스 오브 파워>를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가 게임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게임을 진행하고 그 뒤에 숨은 원리들을 학습할 수록 지정학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디자인 상의 흠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또한 예측 가능한 현상이다. 그리고 사실 게임의 성공을 가늠하는 가장 좋은 척도이다. 플레이어를 변화시키지 못 한 게임은 실패한 것이다. 게임은 플레이어를 더 높은 이해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그 과정에서 게임과 나란히 서 있던 플레이어를 그 어깨 위에 서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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